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− | * 초대 회장은 [[최흥종]], 초대 간사는 [[최원순]]이 맡았으며, 충장로 남창상회의 [[심덕선]], 무등양말 양태승, [[광주극장]] [[최선진]] 등과 재정적 후원자인 [[현준호]], 김신석 등 당시 광주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사들이 참여했다. | + | * 초대 회장은 [[최흥종]], 초대 간사는 [[최원순]]이 맡았으며, 충장로 남창상회의 [[심덕선]], 무등양말 [[양태승]], [[광주극장]] [[최선진]] 등과 재정적 후원자인 [[현준호]], 김신석 등 당시 광주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사들이 참여했다. |
* 제2대 회장은 [[신간회]] 광주지회 간사로 활동했던 김용환이다. | * 제2대 회장은 [[신간회]] 광주지회 간사로 활동했던 김용환이다. | ||
* [[계유구락부]]는 [[광주천_직강공사|광주천 직강공사]] 후 1936년 광주천 개수공사를 벌이면서 강제 철거된 금동, 양동, 학동 일대 천변 영세민에 대한 구제 사업을 펼쳤으며, 수시로 경향각지의 저명한 인사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. | * [[계유구락부]]는 [[광주천_직강공사|광주천 직강공사]] 후 1936년 광주천 개수공사를 벌이면서 강제 철거된 금동, 양동, 학동 일대 천변 영세민에 대한 구제 사업을 펼쳤으며, 수시로 경향각지의 저명한 인사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. | ||
− | * [[계유구락부]]는 1934년 6월 26일 [[서서평]] 선교사가 타계했을 때 광주 최초의 사회장(社會葬)을 추진했다. 항일의식이 매우 투철했던 [[서서평]] 선교사의 사회장은 그 자체가 일제에 대한 일종의 시위를 의미했다.<ref>[http://seoults.com/news/view.php?idx=460 서울통신, 광주의 인물, 독립운동가 석아 최원순]</ref> | + | * [[계유구락부]]는 1934년 6월 26일 [[서서평]] 선교사가 타계했을 때 광주 최초의 사회장(社會葬)을 추진했다. 항일의식이 매우 투철했던 [[서서평]] 선교사의 사회장은 그 자체가 일제에 대한 일종의 시위를 의미했다.<ref>[http://seoults.com/news/view.php?idx=460 서울통신, 광주의 인물, 독립운동가 석아 최원순, 2020-04-17]</ref> |
* 참조: http://aks.ai/GC60002185 , http://aks.ai/GC60002636 | * 참조: http://aks.ai/GC60002185 , http://aks.ai/GC60002636 | |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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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24년 2월 26일 (월) 23:24 기준 최신판
Definition
- 계유구락부(癸酉俱樂部): 1933년 계유년(癸酉年)에 최원순이 최흥종과 함께 결성한 민중계몽운동과 빈민구제활동을 위한 지역 유지모임이다.
- 초대 회장은 최흥종, 초대 간사는 최원순이 맡았으며, 충장로 남창상회의 심덕선, 무등양말 양태승, 광주극장 최선진 등과 재정적 후원자인 현준호, 김신석 등 당시 광주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사들이 참여했다.
- 제2대 회장은 신간회 광주지회 간사로 활동했던 김용환이다.
- 계유구락부는 광주천 직강공사 후 1936년 광주천 개수공사를 벌이면서 강제 철거된 금동, 양동, 학동 일대 천변 영세민에 대한 구제 사업을 펼쳤으며, 수시로 경향각지의 저명한 인사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.
- 계유구락부는 1934년 6월 26일 서서평 선교사가 타계했을 때 광주 최초의 사회장(社會葬)을 추진했다. 항일의식이 매우 투철했던 서서평 선교사의 사회장은 그 자체가 일제에 대한 일종의 시위를 의미했다.[1]
- 참조: http://aks.ai/GC60002185 , http://aks.ai/GC60002636