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* 광주 출신 [[김방|김방(金倣, 미상)]]은 1415년 지김제군사(知金堤郡事)로 김제의 저수지인 [[김제_벽골제|벽골제]]를 수리의 감독을 맡아 김제평야를 곡창지대로 만들었다. <ref>「김제 고적조 - 중수 비문」, 『동국여지승람』</ref> 이때 겨우 2만명의 인부로 20여일만에 수리하였다.<ref>[https://sillok.history.go.kr/id/kda_10301016_008 『세종실록』, 세종 3년 1월 16일: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와 수군 도절제사 박초가 벽골제와 눌제의 수축에 대해 아뢰다]</ref> 이후 후임 전라도관찰사 권진(權軫)이 작은 죄를 범했다면서 파직 시켰으나, 1418년 [[김제_벽골제|벽골제]] 재수리 논의 시 태종이 [[김방]]의 파직 소식을 듣더니 쓸만한 인물이니 후일 서용하라고 하였다.<ref>[https://sillok.history.go.kr/id/kca_11801013_004 『태종실록』, 태종 18년 1월 13일: 판광주목사 우희열이 제언의 일을 상서하다]</ref> 이후 다시 관직을 받게 되어 전라도 도절제사 진무(都節制使鎭撫)를 지낸 기록이 확인된다.<ref>[https://sillok.history.go.kr/id/kda_10210016_004 『세종실록』, 세종 2년 10월 16일: 사간원이 올린 김방·박초의 치죄에 관한 상소문]</ref>
 
* 광주 출신 [[김방|김방(金倣, 미상)]]은 1415년 지김제군사(知金堤郡事)로 김제의 저수지인 [[김제_벽골제|벽골제]]를 수리의 감독을 맡아 김제평야를 곡창지대로 만들었다. <ref>「김제 고적조 - 중수 비문」, 『동국여지승람』</ref> 이때 겨우 2만명의 인부로 20여일만에 수리하였다.<ref>[https://sillok.history.go.kr/id/kda_10301016_008 『세종실록』, 세종 3년 1월 16일: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와 수군 도절제사 박초가 벽골제와 눌제의 수축에 대해 아뢰다]</ref> 이후 후임 전라도관찰사 권진(權軫)이 작은 죄를 범했다면서 파직 시켰으나, 1418년 [[김제_벽골제|벽골제]] 재수리 논의 시 태종이 [[김방]]의 파직 소식을 듣더니 쓸만한 인물이니 후일 서용하라고 하였다.<ref>[https://sillok.history.go.kr/id/kca_11801013_004 『태종실록』, 태종 18년 1월 13일: 판광주목사 우희열이 제언의 일을 상서하다]</ref> 이후 다시 관직을 받게 되어 전라도 도절제사 진무(都節制使鎭撫)를 지낸 기록이 확인된다.<ref>[https://sillok.history.go.kr/id/kda_10210016_004 『세종실록』, 세종 2년 10월 16일: 사간원이 올린 김방·박초의 치죄에 관한 상소문]</ref>
* [[김방]]은 [[경양방죽|경양방죽(경양지)]]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. 이는 '''[[광산읍지|『광산읍지(光山邑誌)』]]''', 일제강점기 시절 작성된 중추원의 『水利에 關한 舊慣』(1913)에 기록되어 있으며<ref>제2장 ‘수리시설의 종류 및 성질’, 제1 ‘관개용 시설’, 甲 ‘堤堰’의 ‘民有堤堰’ 중 ‘共有堤堰’에 김방이 경양방죽을 수축했다는 설이 수록되어 있다.(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강점기)</ref>, 그가 김제에서 저수지 시설을 증축하고 관리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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* [[김방]]은 [[경양방죽|경양방죽(경양지)]]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. 이는 '''[[광산읍지|『광산읍지(光山邑誌)』]]''', 일제강점기 시절 작성된 중추원의 『水利에 關한 舊慣』(1913)에 기록되어 있으며<ref>제2장 ‘수리시설의 종류 및 성질’, 제1 ‘관개용 시설’, 甲 ‘堤堰’의 ‘民有堤堰’ 중 ‘共有堤堰’에 김방이 경양방죽을 수축했다는 설이 수록되어 있다.(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강점기)</ref>, 그가 김제에서 저수지 시설을 증축하고 관리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. <ref>단 [[경양방죽]]을 광주목사 시절에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많으나, 김방의 광주목사 임명 기록은 없으며 [[경양방죽]]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440년대에는 광주목사 직책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틀린 것으로 보인다.</ref>
 
* 또한 그는 1443년 [[증심사|증심사(證心寺)]]를 중창하고, [[증심사오백전|증심사오백전(證心寺五百殿)]]을 짓고 오백나한(五百羅漢)과 10대 제자상(十大弟子像)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. 이외에도 세종 대에 [[화순_쌍봉사]]의 중창을 후원하였고, 이를 기리기 위해 그의 '''영정을 봉안하였다'''<ref>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</ref>, '''병화로 소실되었다.'''
 
* 또한 그는 1443년 [[증심사|증심사(證心寺)]]를 중창하고, [[증심사오백전|증심사오백전(證心寺五百殿)]]을 짓고 오백나한(五百羅漢)과 10대 제자상(十大弟子像)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. 이외에도 세종 대에 [[화순_쌍봉사]]의 중창을 후원하였고, 이를 기리기 위해 그의 '''영정을 봉안하였다'''<ref>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</ref>, '''병화로 소실되었다.'''
 
* 그의 영정은 '''[[화순_쌍봉사]]'''<ref>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</ref>, '''[[광주 약사암]]'''<ref>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</ref>, [[증심사|광주 증심사]],<ref>김정호, 『광주산책(하)』, 광주광역시 광주문화재단, 2015. (ISBN:9788998057190)</ref> [[보성_백산사]]<ref>[http://www.kwangsankim.co.kr/bbs/board.php?bo_table=kwangsan28&wr_id=96 광산김씨대종중 홈페이지], 광산김씨대종중.</ref>'''에 봉안되었다.
 
* 그의 영정은 '''[[화순_쌍봉사]]'''<ref>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</ref>, '''[[광주 약사암]]'''<ref>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</ref>, [[증심사|광주 증심사]],<ref>김정호, 『광주산책(하)』, 광주광역시 광주문화재단, 2015. (ISBN:9788998057190)</ref> [[보성_백산사]]<ref>[http://www.kwangsankim.co.kr/bbs/board.php?bo_table=kwangsan28&wr_id=96 광산김씨대종중 홈페이지], 광산김씨대종중.</ref>'''에 봉안되었다.

2023년 11월 12일 (일) 16:10 판


다양한 설화 속 광주목사 김방을 통해 보는 현재의 광주 》 유능함을 인정받아 관직에 복귀한 김방의 일생

  • 수정중

Story

  • 광주 출신 김방(金倣, 미상)은 1415년 지김제군사(知金堤郡事)로 김제의 저수지인 벽골제를 수리의 감독을 맡아 김제평야를 곡창지대로 만들었다. [1] 이때 겨우 2만명의 인부로 20여일만에 수리하였다.[2] 이후 후임 전라도관찰사 권진(權軫)이 작은 죄를 범했다면서 파직 시켰으나, 1418년 벽골제 재수리 논의 시 태종이 김방의 파직 소식을 듣더니 쓸만한 인물이니 후일 서용하라고 하였다.[3] 이후 다시 관직을 받게 되어 전라도 도절제사 진무(都節制使鎭撫)를 지낸 기록이 확인된다.[4]
  • 김방경양방죽(경양지)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. 이는 『광산읍지(光山邑誌)』, 일제강점기 시절 작성된 중추원의 『水利에 關한 舊慣』(1913)에 기록되어 있으며[5], 그가 김제에서 저수지 시설을 증축하고 관리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. [6]
  • 또한 그는 1443년 증심사(證心寺)를 중창하고, 증심사오백전(證心寺五百殿)을 짓고 오백나한(五百羅漢)과 10대 제자상(十大弟子像)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. 이외에도 세종 대에 화순_쌍봉사의 중창을 후원하였고, 이를 기리기 위해 그의 영정을 봉안하였다[7], 병화로 소실되었다.
  • 그의 영정은 화순_쌍봉사[8], 광주 약사암[9], 광주 증심사,[10] 보성_백산사[11]에 봉안되었다.

Semantic Data

Node Description

id class groupName partName label hangeul hanja english infoUrl iconUrl
S2023-004a Story Episode 유능함을 인정받아 관직에 복귀한 김방의 일생 http://dh.aks.ac.kr/~gwangju/wiki/index.php/S2023-004a http://dh.aks.ac.kr/~gwangju/icon/episode.png

Contextual Relations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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type resource title description/caption URL
해설 디지털김제문화대전 김방 http://aks.ai/GC02600764
해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김방(金倣) https://people.aks.ac.kr/front/dirSer/ppl/pplView.aks?pplId=PPL_6JOa_A9999_1_0020421
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양지 (慶陽池)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02675
해설 광주광역시 무등산웹생태박물관 경양호 https://geopark.gwangju.go.kr/gallery.do?S=S03&M=020100000000&b_code=0000000011&v_type=SK1&b_list=16&mod=view&list_no=90&cg_code=MUD04
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증심사 오백전(證心寺 五百殿)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54044
  • type: 해설, 참고, 원문 / 사진, 동영상, 도면, 그림, 지도, 3D_지도, 3D_모델

Bibliography

id type bibliographic index online resource url
NL:203251AH1 단행본 「개미의 보은으로 된 경양방축」, 『광주의 전설』, 광주직할시, 고산연구회, 1990, pp50~52. 국립중앙도서관 https://www.nl.go.kr/NL/contents/search.do?#viewKey=203251&viewType=AH1
KCI:ART002422017 논문 이옥희, 「경양방죽 설화의 전승 담론과 서사 전략」, 『호남학』 64,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, 2018, pp121~149. KCI https://www.kci.go.kr/kciportal/ci/sereArticleSearch/ciSereArtiView.kci?sereArticleSearchBean.artiId=ART002422017
sillok:kca_11801013_004 자료집 『태종실록』, 태종 18년 1월 13일: 판광주목사 우희열이 제언의 일을 상서하다 https://sillok.history.go.kr/id/kca_11801013_004
sillok:kda_10210016_004 자료집 『세종실록』, 세종 2년 10월 16일: 사간원이 올린 김방·박초의 치죄에 관한 상소문 https://sillok.history.go.kr/id/kda_10210016_004
sillok:kda_10301016_008 자료집 『세종실록』, 세종 3년 1월 16일: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와 수군 도절제사 박초가 벽골제와 눌제의 수축에 대해 아뢰다 조선왕조실록 https://sillok.history.go.kr/id/kda_10301016_008
  • id: 인용전거
  • type: 단행본, 논문, 도록, 자료집
  • online resource: KCI, RISS, DBpia, 네이버 학술정보 .....

Notes

  1. 「김제 고적조 - 중수 비문」, 『동국여지승람』
  2. 『세종실록』, 세종 3년 1월 16일: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와 수군 도절제사 박초가 벽골제와 눌제의 수축에 대해 아뢰다
  3. 『태종실록』, 태종 18년 1월 13일: 판광주목사 우희열이 제언의 일을 상서하다
  4. 『세종실록』, 세종 2년 10월 16일: 사간원이 올린 김방·박초의 치죄에 관한 상소문
  5. 제2장 ‘수리시설의 종류 및 성질’, 제1 ‘관개용 시설’, 甲 ‘堤堰’의 ‘民有堤堰’ 중 ‘共有堤堰’에 김방이 경양방죽을 수축했다는 설이 수록되어 있다.(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강점기)
  6. 경양방죽을 광주목사 시절에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많으나, 김방의 광주목사 임명 기록은 없으며 경양방죽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440년대에는 광주목사 직책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틀린 것으로 보인다.
  7. 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
  8. 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
  9. 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
  10. 김정호, 『광주산책(하)』, 광주광역시 광주문화재단, 2015. (ISBN:9788998057190)
  11. 광산김씨대종중 홈페이지, 광산김씨대종중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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