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* 광주 출신 [[김방|김방(金倣, 미상)]]은 1418년 김제군사(知金堤軍事)로 있으면서 김제의 저수지인 [[김제_벽골제|벽골제]]를 보수 공사를 진행하여 김제평야를 곡창지대로 만든 인물이다. 이때 2만명의 인부를 20여일간 동원하여 수리를 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. | * 광주 출신 [[김방|김방(金倣, 미상)]]은 1418년 김제군사(知金堤軍事)로 있으면서 김제의 저수지인 [[김제_벽골제|벽골제]]를 보수 공사를 진행하여 김제평야를 곡창지대로 만든 인물이다. 이때 2만명의 인부를 20여일간 동원하여 수리를 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. | ||
* 이후 후임 전라도관찰사 권진(權軫)이 부임하면서 사소한 실수를 범했다면서 파직시켰으나, 태종 18년 1월 [[김제_벽골제|벽골제]]를 재수리 시 태종이 [[김방]]의 파직 소식을 듣더니 쓸만한 인물이니 후일 서용하라고 하였다. | * 이후 후임 전라도관찰사 권진(權軫)이 부임하면서 사소한 실수를 범했다면서 파직시켰으나, 태종 18년 1월 [[김제_벽골제|벽골제]]를 재수리 시 태종이 [[김방]]의 파직 소식을 듣더니 쓸만한 인물이니 후일 서용하라고 하였다. | |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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− | * [[김방]]은 | + | * [[김방]]은 [[경양방죽|경양방죽(경양지)]]을 만들어 광주 일원의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. 이는 '''[[광산읍지|『광산읍지(光山邑誌)』]]''', 일제강점기 시절 작성된 중추원의 『水利에 關한 舊慣』(1913)에 기록되어 있으며<ref>제2장 ‘수리시설의 종류 및 성질’, 제1 ‘관개용 시설’, 甲 ‘堤堰’의 ‘民有堤堰’ 중 ‘共有堤堰’에 김방이 경양방죽을 수축했다는 설이 수록되어 있다.(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강점기)</ref>, 그가 김제에서 저수지 시설을 증축하고 관리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. |
− | * 또한 그는 | + | * 또한 그는 [[증심사|증심사(證心寺)]]를 중창하고, [[증심사오백전|증심사오백전(證心寺五百殿)]]을 짓고 오백나한(五百羅漢)과 10대 제자상(十大弟子像)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. 이외에도 세종 대에 [[화순_쌍봉사]]의 중창을 후원하였고, 이를 기리기 위해 그의 '''영정을 봉안하였다'''<ref>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</ref>, '''병화로 소실되었다.'''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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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23년 11월 11일 (토) 20:28 판
다양한 설화 속 광주목사 김방을 통해 보는 현재의 광주 》 유능함을 인정받아 관직에 복귀한 김방의 일생
- 수정중
Story
- 광주 출신 김방(金倣, 미상)은 1418년 김제군사(知金堤軍事)로 있으면서 김제의 저수지인 벽골제를 보수 공사를 진행하여 김제평야를 곡창지대로 만든 인물이다. 이때 2만명의 인부를 20여일간 동원하여 수리를 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.
- 이후 후임 전라도관찰사 권진(權軫)이 부임하면서 사소한 실수를 범했다면서 파직시켰으나, 태종 18년 1월 벽골제를 재수리 시 태종이 김방의 파직 소식을 듣더니 쓸만한 인물이니 후일 서용하라고 하였다.
- 이후 다시 관직을 받게 되어 지고부군사(知古阜郡事), 전라도 도절제사 진무(都節制使鎭撫)를 지낸 기록이 확인된다.[1]
- 김방은 경양방죽(경양지)을 만들어 광주 일원의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. 이는 『광산읍지(光山邑誌)』, 일제강점기 시절 작성된 중추원의 『水利에 關한 舊慣』(1913)에 기록되어 있으며[2], 그가 김제에서 저수지 시설을 증축하고 관리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.
- 또한 그는 증심사(證心寺)를 중창하고, 증심사오백전(證心寺五百殿)을 짓고 오백나한(五百羅漢)과 10대 제자상(十大弟子像)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. 이외에도 세종 대에 화순_쌍봉사의 중창을 후원하였고, 이를 기리기 위해 그의 영정을 봉안하였다[3], 병화로 소실되었다.
- 광주 도심과 무등산 증심사를 이어주는 다리인 배고픈 다리는 이름에 대한 여러가지 유래가 있는데, 그 중 한 이야기가 김방과 관련된 것이다.
- 그의 영정은 화순_쌍봉사[4], 광주 약사암[5], 광주 증심사,[6] 보성_백산사[7]에 봉안되었다.
Semantic Data
Node Description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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S2023-004a | Story | Episode | 유능함을 인정받아 관직에 복귀한 김방의 일생 | http://dh.aks.ac.kr/~gwangju/wiki/index.php/S2023-004a | http://dh.aks.ac.kr/~gwangju/icon/episode.png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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해설 |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| 증심사 오백전(證心寺 五百殿) |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54044 |
- type: 해설, 참고, 원문 / 사진, 동영상, 도면, 그림, 지도, 3D_지도, 3D_모델
Bibliography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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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type: 단행본, 논문, 도록, 자료집
- online resource: KCI, RISS, DBpia, 네이버 학술정보 .....
Notes
- ↑ 광주광역시 무등산웹생태박물관 홈페이지 디지털아카이브, 광주광역시.]
- ↑ 제2장 ‘수리시설의 종류 및 성질’, 제1 ‘관개용 시설’, 甲 ‘堤堰’의 ‘民有堤堰’ 중 ‘共有堤堰’에 김방이 경양방죽을 수축했다는 설이 수록되어 있다.(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강점기)
- ↑ 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
- ↑ 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
- ↑ 쌍봉사 사적비명(1780년에 홍물관 대제학 김종수(1728-1799) 씀)
- ↑ 김정호, 『광주산책(하)』, 광주광역시 광주문화재단, 2015. (ISBN:9788998057190)
- ↑ 광산김씨대종중 홈페이지, 광산김씨대종중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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